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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醫窓]새로운 한 해의 삶 [1997. 01. 03]
w병원 | 2008-12-23 00:00:00 | Hit : 41,369

연구실에서 성형외과 병동을 갈 때면 항상 지나쳐야 하는 곳이 있다. [보호자 외 절대 출입금지]팻말이 눈에 띄게 붙어있고, 일반 병실임에도 불구하고 병실안으로 들어 갈 때는 신발을 벗든지 갈아 신어야 하는 곳이다. 또한 거기에는 한 두 살도 채 안된 유아부터 국민학교 5.6학년 아이들까지 한결같이 깨끗하게 깍아버린 머리 모양을 하고 핏기 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 바로 [소아 암]환자 병실이다. 병고에 지쳐 피곤함이 얼굴에 가득찬 환아들, 그리고 그 아이들의 어머니들...


또한 병원에서 인생의 모든 역정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응급실이다. 요즘 흔히 이야기되고 있는 40대 가장들의 돌연사나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은 고인이 된 당사자 뿐만 아니라 남아 있는 가족에게도 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평소와 다름없이 아침 식사를 하고 출근한 사람이 병원 응급실 한켠에 있는 침대에 싸늘한 주검으로 누워있을 때 가족들의 오열하는 모습들...


흔히 우리는 살아 숨쉬고 있다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소중한 사실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르고 지내고 있다. 매일 마주 대하는 가족들의 얼굴, 직장동료, 친구들, 그리고 자기를 알아 주는 모든 사람들과의 만남, 그리고 지루하리만큼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소중함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친한 친구 아들 녀석이 커피 끓일 물을 손에 엎질러 팔과 손 전체에 2도의 화상을 입고 성형외과 병동에 입원을 하였다. 약 3주간의 입원 치료로 다행히 피부 이식수술을 하지 않고 상처 치료로 완치되어 퇴원 하였다. 그러나 화상 치료는 제쳐두더라도 늘 병실을 지키며 침대에서 새우잠을 청해야 했던 친구는 그 동안의 불편함을 호소했다.


퇴원하는 날, 친구는 불평 아닌 불평을 늘어 놓았다. 평소에는 퇴근하여 집에 가서, 가족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같이 TV를 보고 잠을 자는 그런 일상 생활들이 당연한 것인 줄 알았는데 이런 것들이 모두 깨어지니까 직장 생활까지 엉망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소에 가족끼리 보냈던 많은 시간들이 결코 무의미한 것이 이니었고, 너무나 소중한 순간들었음을 새삼 깨달았다는 얘기다.


임종을 앞둔 말기 암 환자들이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불안해 할 때 일주일에 두세번씩 방문하여 말 벗이 되어주고, 정신적 친구가 되어주는 사람들의 방문을 받는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강력하게 죽음을 거부하던 환자가 [죽음]을 자신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나면, 무척이나 순수하고 아름답게 세상을 바라본다고 한다.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병실 밖의 풍경이라도 볼때면 하찮은 자연의 현상들 즉, 바람의 불고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 비가 오는 것, 먼 하늘 구름 속으로 날아가는 새들 등이 임종을 앞두고 있는 이들에게는 결코 사소하지 않은 아름다운 자연 현상으로 여겨진다. 그러한 풍경들이 자기 생애에서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늦 가을, 할머니께서 숙환으로 운명하셨다. 아흔을 바라보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삶에 대한 애착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고독함으로 무척이나 불안해 하셨다. 임종 일주일 전, 의사 손자인 필자의 손을 잡으시고는 [언제 죽을 지 진맥 한 번 잡아 봐, 곧 죽겠지...!] 쇠약해지는 기력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또렷한 의식상태에서 하시는 말씀에는 이미 죽음을 예견하고 계셨던 것 같다. 아무리 천수를 누려도 죽음 앞에선 고독하고 외로워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일까?


또 한 해가 새로이 시작된다. 그냥 저절로 다가오는 시간들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소중하고 안타까운 시간들이리라. 신께서 부여한 삶의 새로운 순간들로 인정할 때 과연 이러한 좋은 기회에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보내야 할 지 한번쯤 곰곰히 생가해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사회는 가치의 상실과 표준되어야 할 철학의 빈곤에서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잘 알 수 없는 총체적 혼란에 빠져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혼탁한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만이라도 우리를 둘러싼 모든 환경과 사람들에게 항상 감사하는 마을을 가지고 일상에 충실해야 할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