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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부외과 전문과목의 독립을 꿈꾸며 [1998. 01. 01]
w병원 | 2008-12-23 00:00:00 | Hit : 41,910
1964년 미국 최초로 완전 절단된 엄지손가락을 접합하였고, 1999년에는 프랑스에 이어 세계 두번째로 수부이식수술 (뇌사자의 팔을 기증받아 팔이 없는 사람에게 옮기는 수술)을 성공적으로 시행한 수부외과 및 미세수술 전문병원인 클라이넛연구소 (Kleinert's Hand & Microsurgery Institute) - 한국 최초의 정식 ‘임상교수(Clinical Fellow, 이하 CF로 약자표기)로 1년간(1999년 7월 ? 2000년 6월) 일과 공부를 할 수 있다는 합격 통지서를 98년 가을에 받았다.

손가락 접합수술과 응급수술로 밤을 지새면서도 그렇게 꿈꾸던 곳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기쁨도 잠깐, 합격 통지서와 같이 보내온 것은 일을 시작하기 전에 꼭 읽어야 할 필수논문 리스트에는 1,000 여편 이상의 수부외과와 미세수술에 대한 논문 제목들이 있었다. 게다가 비록 10년 가까이 영어회화 공부를 개인적으로 하고 있었지만 미국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영어권에서 의학공부를 한 것도, 수련을 받은 것도 아닌데 병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영어로 다 해결해야 할 일을 생각하니 도저히 자신이 없어 주임교수와 상의한 끝에 2개월 미리 출국하였다.

켄터키주 루이빌시 다운타운 , 여러 개의 병원건물이 구름다리로 모두 연결되어 의사나 간호사도 많고, 동양인도 많지만 한국 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병원에 있을 때는 완전히 낙도에 고립된 느낌이었다. 너무나 풍부한 일회용 의료물품과 한번도 보지 못했던 새로운 장비, 책에 나오는 거의 모든 종류의 수부외과 수술(관절염, 신경압박증후군, 손목통증, 상완신경총 손상, 선천성 수부기형 등등)과 너무나도 많은 환자들로 입이 크게 벌려질 정도였다.

세계 최고의 손수술 및 미세수술 센터로 자부하는 이 병원은 14명의 저명한 교수들이 서로 경쟁하고 격려하면서, 낮에는 예정된 수술로, 밤에는 응급수술로 수술실에 불이 꺼지질 않았다. 미국 최초로 수부이식수술을 성공적으로 시행한 Dr. Breidenbach는 토요일에도 예정된 수술을 10개씩이나 올리기도 하였다. 외래시간엔 교수당 40-100 명의 환자를 7-8개의 방에서 동시에 나누어 보는데, 환자는 가만히 앉아 있고 CF, 교수, 물리치료사, 보조기 담당자, 간호사, 산재담당자, 카운셀러, 방사선 기사들이 돌아가면서 환자의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도 서로 의논하며 환자 한명, 한명에 최선을 다하였다.

임상교수는 미국 본토출신 13명, 세계각국에서 14명 등 모두 27명이 1-2년 스케줄로 교수들과 함께 일을 하는데, 미국 CF들은 성형외과나 정형외과를 마친 후 수부외과 전문 분야를 공부하기 위해 혹은 좀 더 나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 1-2년간의 과정을 거치고, 국제 CF들은 엄격한 기준에 의해 아시아, 유럽, 남미 등 세계 각국에서 선발된 이미 임상 경험이 있는 전문의들이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아침 6시 30분엔 교수들과 CF 혹은 외부 초청 강연자들이 준비한 다양한 주제에 대하여 심도 깊은 한 시간의 세미나를 하였다. 약 30분간의 회진 후 아침 8시엔 외래와 수술이 동시에 시작되어 환자에게 주는 불편을 최소화 하면서 근무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용하였다. 가끔 밤새도록 한 응급수술 때문에 새벽 세미나에 빠지는 것을 제외하고 79세의 Dr. Kleinert부터 교수, 모든 CF들이 서로 의견을 주고 받는다. 이런 것을 보면서 우리 병원과 대학의 시스템이 얼마나 의사 본위로 되어있고, 교수와 전공의들이 공부를 게을리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이 되었다.

한 명의 교수와 국내 , 국제 CF 한 명씩 3명이 한조가 되어 항상 함께 움직이는데 매달 팀이 바뀌게 된다. 외래에서는 CF가 가장 먼저 환자의 병력을 문진하고 이학적 검사를 통하여 진단명과 치료계획까지 꼼꼼히 기술해 놓으면 교수가 환자를 보면서 서로 의견이 다른 부분에 대해서 토론을 한다. 수술실에서는 모든 수술의 시작과 끝을 CF에게 맡겨 교수들이 도와주는 형태로 진행하고, 응급수술은 CF에게 좀 더 많은 책임이 부여된다. 당직은 평균 주중 한번, 주말 한번으로 한달에 8-9번 정도의 당직을 서게 되는데, 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어 다음 날 외래시간엔 환자와 문진하면서 졸기도 하였다. 가까이는 자동차로 4-5시간 거리에서, 멀리는 헬기로 4-5 시간이나 걸려 다른 주의 손이나 팔이 절단된 환자들이 이송되어 왔다. 어떨 땐 인대 손상 같은 경미한 외상도 멀리서 수부외과 전문병원으로 보내는 의료구조에 놀라기도 하였다. 바쁜 날엔 3-4개의 수술방에서 교수 한명과 CF 3-4명이 밤새도록 응급환자를 처리해도 그 다음 날 당직 팀에게 환자를 인계할 정도였다. 처음엔 이 사람들의 일에 대한 열정과 정성이 너무 심하다 싶은 느낌이 들 었으나 차차 이것이 진정한 '프로의 세계'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당직 교수들은 자신의 당직 날에는 병원에서 CF들과 같이 수술을 하면서 논문 정리와 수술 기록지 점검으로 밤을 지새고, 우리 같으면 1-2년차 레지던트가 대충하고 치울 사소한 손가락 끝 손상에도 수술전 많은 토론을 유도하였다.

환자의 모든 기록 (신환의뢰서, 입원요약지, 수술기록지, 응급환자 보고서, 퇴원요약지)은 항상 들고 다니는 전화기(dictaphone)에 녹음하여 일의 능률을 올린다. 미국이나 영어권 CF들이 수술기록지 하나 구술하는데 2-3분이면 족할 일을 필자는 직접 메모지에 영어 문장을 만들어 다시 녹음하니 30분에서 한 시간 이상의 시간이 더 걸렸다. 교수의 수술날과 당직날은 보통 겹쳐 당직날 평균 15-20개의 수술기록지와 응급환자 보고서를 녹음해야 하는데 당직후 퇴근하여 집에서 이를 위해 보내야 하는 시간은 어마어마 하였다. 수 부외과나 미세수술 술기로 따지면 적지 않은 경험과 논문을 가지고 있지만 초반기엔 의사소통이 원할하지 못해 제 1번 당직때에는 병실 입원환자의 사소한 문제부터 켄터키주 뿐만 아니라 다른 주에서 쉴새없이 걸려오는 환자 이송에 대한 전화로 웃지 못할, 아니 울고 싶을 정도의 많은 실수를 하여 본의 아니게 천덕꾸러기 같은 존재가 되었다. 또한 마음속 깊은, 정감있는 표현을 제때에 제대로 하지 못해 교수나 다른 CF들과 친숙한 관계를 못 유지하였다 . 그러나 일을 시작한지 한 달쯤 지났을 때 , 교수와 모든 당직 CF들이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엄지 손가락의 끝부분이 잘려온 환자에서 두시간 반만에 미세현미경 수술로 성공시켜 그들을 놀라게 하였다. 또한 유창하지 못한 영어에도 불구하고 자청해서 발표한 7번의 새벽 세미나에서 필자가 보여준 발가락을 이용한 손가락 재건술, 유리 피판 재건술, 화상입은 손의 교정, 손가락 재접합술 등에 대한 수술 결과로 그들의 높은 콧대를 꺾을 수 있었다. 또한 지난 5 년간 제 1저자로 미국 성형외과학회지와 영국 수부외과학회지에 게제되었던 5편의 논문들을 그들이 확인하면서 미세수술만 있으면 교수들이 필자를 찾게 되었고, 호칭도 Dr. Woo에서 Professor Woo로 바뀌었다.

많은 경우 , 해외연수시 기초연구나 임상관찰을 하기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 시간을 조절해 연수기간 동안 시간을 내서 여행이나 운동도 하지만 필자의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잠을 좀 더 잘 수 있을까?' 하는 거였다. 가족들은 해외연수를 가면 한국에서 못누렸던 여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다고 기대가 많았었는데 막상 미국에 오니까 집에서는 잠만 자고, 당직한다고 일주일에 2-3일 집에 들어오지 않고, 더 피곤해 보인다고 불평이 많았다. 특히 주말에 예비당직(집에서 하는 대기당직)이라도 겹치면 아무리 좋은 날씨와 경치에도 온 가족이 집안에서 같이 당직하면서(?) 언제 울릴지 모르는 페이저(삐삐)에만 온갖 신경을 다 쏟았다.

출국이 한 달도 남지 않았을 무렵에 당한 갑작스러운 선친의 변고는 자신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회한과 갈등에 빠지게 했고 , 마치 13-4년전 전공의 시절로 돌아간 듯한 루이빌의 병원생활은 ‘내가 왜 이 나이에 낯선 나라에 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가?' 하는 회의로 하루에도 몇번씩 때려치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미국 땅에서 자기들이 나를 필요해서 미국 의사면허증까지 얻어주면서 일을 시키고, 내가 전공하는 분야의 세계 최고의 센터에서 그들과 함께 숨을 쉬며 같이 수술을 한다는 사실과 항상 마음속에서 떠나질 않는 ‘한국 의사에 대한 첫인상을 좋게 남겨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다시금 각오를 다졌다.

켄터키주의 애칭은 '푸른 잔디의 주(The State of Blue Grass)'로 온 천지가 잔디로 덮여있고, 집앞 정원에는 보통 수 십년된 고목이 한두 그루씩 서 있었다. 그래서 일까? 40년의 역사에 1,000 여명의 CF를 배출한 클라이넛 연구소의 각 구성원 한사람, 한사람들이 여유로웠고, 이들의 이방인에 대한 친절과 배려가 없었다면 나의 미국 수련과정도 불가능하였으리라 생각된다. 특히 그 바쁜 임상과정 중에서도 ‘사체를 이용한 신전건에 대한 실험적 연구'를 맡겨 계속 스트레스(?)를 준 대만계 Dr. Tsai 교수 부부의 호의와 배려에 감사를 드린다.

마지막으로 , 이젠 우리나라에서도 장기별 특수클리닉화 추세에 발맞추어 성형외과나 정형외과 구분없이 ‘수부외과' 전문과가 독립되어 손과 팔에 발생하는 모든 문제 즉, 손지림, 관절염, 골절, 종양, 화상, 손목 통증, 외상, 기형 등을 수부외과 전문의가 해결할 수 있는 시기가 오기를 기대해 본다.